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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개항기1. 흥선대원군 섭정기 1863~1873

by 천박사 202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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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조광조, 대동법을 전파를 위해 노력한 김육과 함께 조선의 3대 개혁가이다.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근 척화비로 유명한 흥선대원군이 뭔 개혁인가 했더니, 전통 체제 유지와 전제 왕권 강화를 목표로한 복고적인 개혁 정치를 했다는 의미에서의 개혁가였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의 아버지이고, 본명은 이하응이다. 그는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묘가 파헤쳐지는 남연군의 아들인데, 남연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인신군의 넷째아들이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똑똑했던 영조와 천재였던 정조의 후손인 셈이다.

흥선대원군은 10살이었던 아들 고종 대신 1863년~1873년 10년간 섭정을 하였다. 그간에 왕건강화와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하며 여러 개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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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성쌤 별별 한국사 28강 요약정리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1. 흥선대원군은 삼군부를 부활시켜 군국 기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또 세도정치의 힘으로 변질 되어버린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2. 정조의 대전통평 이후 60년만에 영조의 속대전과 성종의 경국대전을 통합한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3.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필요한 비용 마련을 위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고,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양반 소유의 묘지림을 베어 경복궁의 목재로 사용하고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양반과 백성 모두 불만이었고, 당백전 남발로 물가가 폭등했다.
4. 명나라를 왕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만동묘를 철폐하고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없앴다. 양반 유생충의 반발로 흥선 대원군의 퇴진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흥선대원군의 민생안정을 위한 노력>

1.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층의 반발을 초래했다.
2.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사창제를 실시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3.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대장에 오르지 않은 은결을 색출하여 양반과 지주의 불법적 토지 겸병을 금지했다.

<탄핵당한 흥선대원군>

1.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대응>

1. 1866년 프랑스인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2. 1866년 박규수와 평양 관민이 대동강으로 침입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
3.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당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프랑스군은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갔다.
(이는 훗날 박병선박사님의 한 평생의 노력으로 2011년에 임대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병인양요때 프랑스놈들이 가져간 외규장각도서 반환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신 박병선박사님. 선종하시기 전에 한국에 외규장각도서가 돌아온 것을 보셔서 그나마 다행이다 ㅜ


4.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하며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5.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1년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당시 어재연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광성보에서 항전하였지만 함락되어 조선군의 '수'자기를 미군에 빼앗겼다.
6.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 후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는 척화비를 종로와 전국 각지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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