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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조선후기4. 사회 - 평등사회로의 움직임 feat. 홍경래, 임술농민봉기, 양반전

by 천박사 20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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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2. 조직, 외교 feat. 맨발 미개한 일본에게 문화를 전파하던 조선통신사
 조선후기3. 경제 - 상품, 화폐, 상인 등 자본주의의 싹이 트던 시기

조선후기의 경제가 지금의 자본주의로의 싹이 트는 모습이 보였던 것처럼,
조선후기의 사회모습 또한 신분제가 없는 평등사회로의 움직임이 강하게 꿈틀대던 시기이다.

조선의 마지막으로 똑똑한 왕 정조가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왕실과 혼인을 맺은 외척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헌종>철종으로 2번이나 바뀌는 안동김씨 > 풍양조씨로 60년동안 답없는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이에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종특이라 해야할까, 더 이상은 못살겠다며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평등사회로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재미있는건 이 시기에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왕조가 된다는 "정감록"이라던지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 등 예언서가 유행했다. 원래 힘들수록 샤머니즘에 의지하는 법이다.

 

게다가 갖은 수탈에 괴롭히던 노비들은 도망가서 일 할 사람이 없어지고, 돈 많은 농민과 상민은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니 일할 사람을 만들기 위해 순조가 공노비를 해방시켜주기도 하고, 반대로 돈 없는 양반은 몰락하기도 하면서 양반의 권위가 약화되고, 신분제의 체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의 '양반전' 소설, 그때나 지금이나 문학을 통해 그 시대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서학이라고 불리던 천주교가 확산되고,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도 빠르게 확장되었는데 이 모두 인간 평등을 내세웠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을 잘 설명한 그림

무엇보다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으로 2번의 큰 농민봉기를 통해 정부에서도 위협을 느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때문에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식민사관 쌉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직 있다면, 한국사자격증취득을 추천한다.


1. 조선 후기에 부를 축적한 상민층은 납속과 공명첩을 이용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고, 부농층 또한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방법으로 양반 신분을 얻어 양반 수가 증가하였다.

: 납속책은 국가 재정이나 구호 대책을 보조하기 위해 마련된 정책으로 곡식이나 돈을 내면 그 대가로 관직을 주거나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공명첩은 空. 名. 말 그대로 비어있는 곳에 이름을 적는 장이라는 뜻으로, 왜란 중에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급한 것으로 부유한 상민의 신분 상승에 이용되었다.

 

2. 서얼은 수차례 통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3. 통역관, 의관, 천문관, 율관 등 전문적 기술을 가진 기술직 중인은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달라는 대규모 소청 운동을 전개하였다.

: 중인도 시를 짓는 문학 활동을 하는 모임 시사를 조직하여 양반처럼 풍류를 즐겼다. 이처럼 양반 이하의 신분층도 문학활동을 누리는 위항 문학이 발달했다.

 

4. 순조는 군역 대상자를 확보하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공노비를 해방하였다.

 

5. 조선 후기에는 "정감록", "도참" 등을 이용한 예언 사상이 널리 유행하였다.

 

6. 청에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 천주교가 서학으로 소개되고,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신앙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제사를 거부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 순조 때 신유박해로 수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고, 천주교도였던 이승훈, 정약용 등도 연루되어 처벌되었다. 

 

7. 동학은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인내천 사상을 내세워 인간 평등을 주장하였다.

: 유·불·선을 바탕으로 민간 신앙의 요소까지 결합되어 있었으며, 마음 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를 강조하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삼았다.

 

8. 1811년, 순조 때 지배층의 수탈과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여 홍경래가 우군칙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 한 때, 청천강 이북 지역의 가산, 선천, 정주 등을 점령하기도 했는데 5개월여만에 진압되었다. 만약 이 때 봉기가 성공했다면 신분제가 더 빨리 폐지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9. 1862년, 임술년에 진주에서 농민들이 백낙신의 탐학에 반발하여 봉기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 경상 우병사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진주 농민들이 유계춘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한 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며 조선 정부는 놀라서 진주 농민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10. 조선 정부는 임술농민봉기의 주요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위해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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