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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고려1. 고려의 정치 feat.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성공했다면 조선의 망할 성리학도, 일제강점기도 없었을텐데

by 천박사 2022.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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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권문세족까지의 고려 정치 개요

1. 고려의 건국 세력 가운데 대대로 고위 관리를 배출한 가문은 문벌을 형성하였다. 문벌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나라)과 전쟁하고 거란을 멸망시킨 여진(금나라)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던 시기

2. 고려 말, 원(몽골) 간섭기 권문세족은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리며 대농장을 소유하였다.

 

 

문벌귀족 시기의 고려 정치

1. 태조는 후삼국 통일 후 민생 안정을 위해 구휼 기관으로 흑창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성종 때 의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태조는 호족에 대한 우호 정책으로 결혼 정책(무려 부인이 29명.. 선넘은 왕건), 성을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폈다. 

호족에 대한 견제 정책으로는 인질을 잡는 신라의 상수리제도 같은 기인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시행하였다. (신라 경순왕이었던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음)

3. 태조는 서경을 중시하여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고, <정계>, <계백료서> 등을 저술하여 규범을 제시하였으며, 세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유민을 포용하였다.

 

4. 광종은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도입하였으며,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복색을 4등급으로 구분하고, '광덕',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5. 경종은 처음으로 직관, 산관 각 품의 전시과를 제정하였다.(시정전시과, 이후 목종 때 개정전시과, 문종 때 경정전시과)

 

6.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지방 세력 통제를 위해 향리제를 정비하였다. 

 

 

고려 초기의 정치 형태

1. 고려는 당의 제도를 본 떠 2성과 6부를 두고, 송의 제도를 본 떠 중추원, 어사대, 삼사 등의 중앙 정치 기구를 설치하였다. 2성 중 하나인 중서문하성은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중앙 관서이며, 수장은 문하시중이었다. 상서성은 6부(이.병.호.형.예.공).

 

2.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밀이 만나서 회의하는 재추회의가 있었다. 재추회의에는 주로 군사 관련 문제를 다루는 회의기구인 도병마사와 법제와 격식을 논의하는 식목도감이 있고 이는 이 두 기관은 고려만의 독자성을 가진다. (도병마사는 고려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바뀜)

 

3.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원은 대간이라고 불렸으며, 간쟁/서경/봉박의 권한을 가지고 언론 기능을 담담하였다.

 

4. 중추원은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하는 기구였고, 어사대는 관리 감찰과 풍기 단속을, 삼사는 화폐와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5. 고려의 지방은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와 군사 지역인 양계로 구성되었고,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고 예비군 성격의 주현군이 설치되었으며, 양계에는 병마사를 파견하고 상비군 성격의 주진군이 설치되었다.

 

6. 고려시대에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 부곡, 소가 있었다.

 

7. 고려의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 및 국경 방위를 맡는 6위로 구성되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고려

1. 인종 때 권력을 독점한 왕실의 외척 이자겸이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지만 척준경이 배신하여 실패하고 척준경도 죽었다. 이후 인종은 묘청과 정지상 등의 서경세력을 키웠다.

 

2.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고, 이런 서경파들은 고구려 계승 의식이 있었으며,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국호를 '대위'로 하고 연호를 '천개'로 바꾸자고 주장) 하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후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조선역사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평가하며, 서경천도운동이 성공했어야 한다고 평가하였다. 완전동감

 

 

3.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신라 계승 의식이 있었으며, 금에 사대를 주장하였다. 김부식 싫다

 

4. 무신에 대한 차별과 의종의 실정을 배경으로 보현원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무신정변 시기의 고려의 정치

-무신집권 초기 :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

-최씨무신정권 : 최충헌-최우등..(60년동안)

-각계 각층에서 고통받으며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난들이 계속되고 고려는 망조 길로 접어듬

 

1. 무신 정변으로 의종은 왕위에서 쫓겨나 거제도로 추방되었고, 무신 정변 직후 무신들의 회의기구였던 중방이 최고 기구의 역할을 하였다. 경대승이 신변 경호를 위해 사병 조직인 도방을 만들었는데 이의민 때 해체되었따가 최충헌이 부활시켰다.

 

2. 최충헌은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 국왕에게 봉사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제안했다.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었다. 

 

3. 최우인사 행정 담당기구로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외교문서 작성 등을 위한 국정 자문을 위해 문신들로 구성한 서방도 설치했다. 

 

4.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편성된 군대로 최씨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5. 수탈이 심했던 무신 정권기에 저항하였던 각계 각층의 난들

-서경 유수인 조위총이 난을 일으켜 정중부 등의 제거를 도모하였다.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도모하며 난을 일으켰다.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하였다. 이에 공주명학소는 충순현으로 승격하였으나 회유일 뿐 고통은 계속 됨

-김사미와 효심이 현재의 경상도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꿈꾸며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개경에서 만적을 비롯하여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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