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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일제강점기1. 1910~1930년대 식민통치

by 천박사 2022.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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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다.
이 날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1910년대, 1920년대, 1930대 순으로 알아본다. 이 부분은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던 것들이 또렷하게 기억날만큼 빡쳤고, 다시 공부를 하며 절로 뻐큐가 써졌다. 뻐큐머거라 왜구들아 ㅗ

<1910년대 무단통치시기 ~ 1919년 3.1 운동>

1. 일본의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 조선총독부의 총독을 임명하고 입법, 사법, 행정권 및 군 통수권을 장악했다. 조선 총독의 직속 자문 기관으로 친일적 한국인으로 구성된 중추원을 설치했으나 정책 심의나 의결 기능이 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이었다ㅗ

2. 1910년대 일제는 강압적인 통치를 목적으로 헌병 경찰제도를 실시하였다. 헌병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군대 안에서 경찰 활동을 하는 끔찍한 혼종인 헌병경찰은 아무 절차 없이 징역이나 형벌을 가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을 가졌다. 또 태형령을 내렸다. 이 두가지는 모두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다ㅗ

3. 일반 관리와 교사가 어린 학생들 앞에서 제복을 입고 칼을 착용하고 수업하고,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한국인 육성 목적으로 우민화 정책인 제1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으로 정하여 일본인은 6년으로 차별을 두었다ㅗ

4. 식민 통치에 필요한 재정 확보 및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ㅗ
기간 안에 소유자가 직접 신고한 토지만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 외엔 모두 뺏어서 조선 총독부에 귀속시켰으며,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싼 값에 넘김.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농업이민 오고,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는 농민이 증가

5.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인의 기업 설립을 제한하기 위해 1910년 회사령을 냈다ㅗ
회사 설립을 위해서는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이 외에도 산림령, 어업령(1911년), 광업령(1915)등 각종 령을 제정하여 민족 자본 성장을 방해했다.

 

<1920년대 문화통치시기 a.k.a 민족분열시기>

1. 전국적인 비폭력 운동이었던 3.1 운동에 깜짝 놀란 왜구들은 통치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하지만 굉장히 기만적ㅗ

-1910년대 조선총독에 무관만 가능 했던 것을 1920년대는 문관 출신도 임명 가능으로 바꾸었지만 실제로 단 한명도 임명 사례 없음
-한국인 참여를 명목으로 지방 자치기구인 도 평의회, 부 면 협의회를 구성하였지만 친일파 혹은 일본인으로 구성
-헌병 경찰제도와 태형을 폐지하고 20년대부터 보통 경찰제를 실시했지만 오히려 경찰 수가 증가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려 치안유지법 제정(1925년)
-1910년대 일본 역사 교육만 하던 일제는 1920년대부터 통치 목적에 부합하는 한국사 편찬을 목적으로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여 "조선사"편찬(1925~1938)
: 당파성론, 정체성론 등 한국인의 정체성을 폄훼하는 역사왜곡을 기본으로 하는 식민사관에 입각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으나 일제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
: 1910년도에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었던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폐간, 2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발행 허용했지만 검열, 기사삭제, 정간 등 언론 탄압 강화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일본처럼 보통학교를 6년제로 연장하고, 경성 제국대학 설립(지금의 서울대)
: 하지만 한국인 취학률이 저조하고, 고등 교육 기회를 제한했으며, 민족 대학 설립을 억제함

2. 일본 내 쌀 부족 문제의 해결과 쌀 수탈을 목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ㅗ

1920년대 쌀 생산량과 유출량 표. 산미증식계획으로 고통받은 한국인&amp;nbsp;

심지어 쌀 수확을 위해 수리시설을 개간하고 관리하기 위한 세금과 공사비, 조합비는 한국인에게 떠넘김. 표에서 보이듯이 쌀 생산량은 증가하지만 한국인의 연간 쌀 소비량은 줄어들고, 일본으로 반출되거나 한국내 일본인이 다 소비. 여러 종류의 쌀이있었지만 쌀 단작화 현상이 심해짐. 모자란 쌀은 만주에서 들여와 충당.


3. 일본인들의 조선 회사 진출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관세와 회사령을 폐지하고,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꾸었다.

: 일본 상품의 유입이 증가하여 한국 기업이 타격을 입어, 물산 장려운동도 일어났다.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ㅗ>

1. 1929년 대공황으로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확산되고, 일본은 군국주의가 가속되어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전쟁 광이 되고, 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여 일본인으로 동화시켜야만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쉽게 동원할 수 있어 시작된 개빡치는 30년대 민족 말살통치 시기이다. 인적, 물적 모든 것을 다 수탈ㅗ

 

2. 학생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억지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게 하고 신사 참배와 매일 아침 일본 왕쪽으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궁성요배와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 강요했다. 창씨개명 안하면 학교도 못가고 소학교의 명칭도 국민학교로 변경ㅗ

 

3.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형이 종료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감시,통제하는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1936), 이후 1941년에는 아무 활동이 없더라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미리 체포, 구금하는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시행했다.

 

4. 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물자수탈 : 전쟁 물자 확보 목적(농기구, 식기 등 모든 금속을 공출하고 지하자원을 강탈)
-금속 공출(금속률 회수령 공포, 1941), 미곡 공출과 식량 배급제 실시
인력 강제동원
-병력 동원 : 지원병제(1938), 학도 지원병제(1943), 징병제(1944) 실시
-노동력 동원 : 국민 징용령(1939)으로 광산, 군수공장, 전쟁 시설 등에 강제 동원
-여성 동원 : 여자정신근로령(1944)로 군수공장과 일본군 성노예로 동원

*일본은 2022년인 현재까지도 위안부 할머님들과 강제 징용되었던 할아버지, 할머님들에게 아직까지 사과는 커녕 없던 일로 치부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1939년 제정된 국가 총동원법 이라는 상위 법 하에 버젓이 남아있는 위의 국민 징용령, 여자정신근로령 등의 하위의 문서에 대한 증거를 인멸해서 없던일로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위안부라는 말도 족같아, 일본군성노예지ㅜ 빨리 사죄하고 보상해, 왜구들아ㅗ

 

5.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폐간했다. (1940) 역시 폰 문화통치

 

 

최태성쌤의 한국사 34강을 요약정리한 것으로 뻐큐와 사견은 공부를 하고 느낀 생각을 추가한 것 입니다.

 

2022.01.10 - [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 일제강점기2. 1910년대 저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흐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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