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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일제강점기2. 1910년대 저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흐름 요약

by 천박사 202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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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 [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 일제강점기1. 1910~1930년대 식민통치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헌병 경찰과 칼찬 순사들이 거리에 돌아다니며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1910년대, 이 와중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고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외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주로 만주지방, 그 중에서도 서간도와 북간도지역을 중심으로 활약을 펼치고, 러시아와 연해주지역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지인 중국 상하이, 심지어 미국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파리까지 그 열망과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먼저 각 지역별로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는지와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정리하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 - 국외>

1. 서간도 지역(남만주)

-신민회 회원들이 이주하여 삼원보를 개척하고, 경학사를 조직했다. (이후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

-신흥강습소(이후의 영화 '암살'의 조진웅이 나왔다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훈련과 동지 양성에 힘썻다(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참여)

 

2. 북간도 지역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이후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헤이그특사로 유명한 이상설이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영화 동주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가 다닌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1920년대를 한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영화 아리랑의 감독으로 유명한 나운규도 명동학교 출신)

 

3.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 건설, 권업회를 조직하여 권업신문을 발간했다.

: 일제와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실업을 장려한다'는 뜻으로 권업회라고 이름지었지만 강력한 한일운동 전개를 목적으로 결성. 권업회에 큰 자금을 댄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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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에 큰 자금을 댄 것은 최재형인데, 조선시대 노비였던 최재형은 러시아에서 무역업을 배워 부를 쌓았고 이를 모두 한평생 독립운동을 후원하는데 힘쓰셨다.

한인들이 발간한 최초의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도 연해주에 있었는데 자금난에 시달린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 암살을 집에서 논의하고 단지동맹을 맺기도 하셨다.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시고 여건이 나빠져 초라하게 지내시다 일본군에 의해 1920년 총살 당하셨다. 

-헤이그특사와 북간도지역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한 이상설의 주도로 대한 1914년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으나 러시아에 의해 강제해산하고 이후 1919년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이후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 대한광복군 정부에서 이상설과 이동휘가 정,부통령으로 선임되었다.

-스탈린에 의해 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였다.(1937) > 지금의 고려인분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 그래서 한국말을 하시는 고려인들이 많다. 고려인의 역사 관련 유튜브 첨부

 

4. 상하이

-신한청년단이 조직되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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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에서도 중요한 김규식 완벽 알기

2022.01.06 - [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 현대1. 광복 이후부터 6.25 전쟁까지

 

1918년 파리 강화회담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부터 상해 임시 정부 외무총장,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임정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3년 외무부장으로 복귀하였다.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재창당을 주도하였고, 그 뒤 다시 임정을 떠났다가 1942년 선전부장으로 복귀하였고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였으며 주로 외교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으나,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때부터 적극적인 반탁론을 보류하고 先과도정부수립 後탁치논의를 주장하며 미소공위에도 협조하였다. 1946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1947년 민족자주연맹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8년 남한 단독 총선거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귀환한 후 총선거 불반대 불참가 입장으로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총선거 출마를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하였다.

 

5. 미주지역

-미국 본토 : 1910년에 조직된 대한인국민회(안창호)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중앙 총회 설치, 흥사단 조직(안창호)

-하와이 : 박용만의 주도로 대조선 국민군단 창설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멕시코 :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학교 설립, 에네켄농장(애니깽)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지만, 성금을 모금하여 독립운동 지원.

 

 

<1910년대 독립운동 - 국내>

1. 독립의군부(1912)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전국의 의병장들과 학생이 참여했으며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강원도로 넓혀갔다.

-대한제국때의 왕정 복벽주의를 표방했으며, 일본의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에게 수차례 국권반환요구서 발송했다.

 

2. 대한광복회(1915)

-대구에서 박상진 등이 주도하여 의병 계열과 애국 계몽 운동 계열을 비밀 결사 형태로 통합했다.

: 박상진은 무려 판사였지만, 독립을 향한 꿈을 위해 부귀영화를 포기한 분이셨다고 최태성쌤이 꼭 기억하자고 하심. 요즘 판사들은..?

-공화정체의 근대 국가 수립을 지향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과 친일파 처단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의 전환점 1919년 3.1운동>

배경

1.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시, 신한 청년당이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2. 1919년 2월 만주의 독립운동가 39명이 독립선언 발표(무오독립선언)하고, 같은시기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일본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준비와 진행

1. 천도교계(손병희), 기독교계(이승훈), 불교계(한용운) 등 종교지도자와 학생 대표들은 고종의 인산일에 맞추어 비폭력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민족 대표 33인이 구성되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2. 같은 시각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도 만세를 외치고, 평양, 원산 등지에서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의 탄압

1. 헌병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발포하고, 수원 화성의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등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결과

1.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이 기만적이긴 했지만 '문화통치'로 바뀌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활성화 되었다. 학생, 농민, 노동자 등 독립 운동의 참여 주체와 기반이 확대되고 다양한 민족 운동의 계기가 됨

2.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통일된 지도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불복족 운동 등 외국의 민족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흐름 요약>

수립과 조직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 선언 발표(상하이, 1917) > 순종의 주권 포기를 국민에 대한 주권 양여로 규정(국민 주권설 정립), 해외 동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수립 주장

-국내 외 여러 임시정부 통합(한성 정부의 법통 계승, 연해주 신한촌의 대한국민의회 조직 흡수) > 상하이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9)

-삼권분립(행정-의정원, 국회-국무원, 사법-법원)에 기초한 민주 공화제 정부

-지도부 :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연해주의 대한광복군 정부 부통령이었음)

 

활동

-미국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고 외교 활동 전개

-국내와의 연락 업무를 위한 비밀 행정 조직으로 연통제를 실시

-이륭양행(중국에 있는 무역회사)에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 연락

-임시 사료 편찬 위원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을 간행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신문을 간행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 공채 발행

 

임시정부의 변화

1. 외교 중심 독립운동의 한계가 드러나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싼 독립운동가 사이의 갈등 심화되었다.

2. 이와중에 1919년 2월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 연맹에 의한 위임 통치를 청원했다.

3. 이에 반발하여 임시 정부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려 국민대표회의(1923)를 진행하던 중 창조파(신채호) vs 개조파(안창호) 의견 대립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탈하고 임시정부는 침체되었다. 

4. 1925년 위임 통치 청원의 책임을 물어 이승만이 탄핵되고 역사학자 박은식이 2대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편되었다. 이후 1927년 국무 위원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 체택하였다. 

5. 1931년 김구가 임시 정부의 활성화를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 한인애국단원이던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본 국왕폭탄으로 저격시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윤봉길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이 명중하여 성공한다. 이봉창의사와 윤봉길 의사는 모진고문을 받다 사형으로 순국하셨다.ㅜ

6. 한인애국단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7. 1940년에 충칭에 정착하고 주석제를 도입하여 주석이 김구가 되었고, 한국 독립당과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8. 1941년 개인, 민족, 국가의 완전한 균등을 추구하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한 건국강령을 발표한다.

9.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합류한다.

10. 1943년 영국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다.

11. 1944년 주석, 부주석제를 도입하여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체제로 개편된다.

12. 1945년 미국 전략 정보국(OSS)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최태성쌤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5강을 요약 정리한 컨텐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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