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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일제강점기3. 1920년대 저항 - 국내 사회·경제적 민족운동과 국외 무장 독립전쟁

by 천박사 202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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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9 - [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 일제강점기1. 1910~1930년대 식민통치

2022.01.10 - [미래를 위한 한국사 공부] - 일제강점기2. 1910년대 저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흐름 요약

 

1910년대의 저항운동이 국내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로 인해 국외에서 무관·민족 학교 설립과 외교에 집중되었다면

1920년대의 저항운동은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일제가 기만적이긴 하나 문화통치(a.k.a민족분열정책)로 변화하며 국내외에서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저항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20년대의 저항운동 - 국내 사회·경제적 저항운동>

1920년대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민족주의의 실력양성운동과 사회주의의 소작·노동 쟁의, 그리고 그 둘의 연합인 신간회, 학생운동인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청년·소년·여성·형평운동이 핵심이다.

국어와 역사, 문화, 종교 분야에서 민족 문화 수호운동과 국내의 의열단을 중심으로한 의열투쟁 등 여러가지 활동이 있었다.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며 1930년대의 독립투쟁으로 이어지는지 관계를 중심으로 요약 정리하였다.

 

(실력양성운동)

1. 민족 경제 자립을 막고 일본 자본을 들이기 위해 일제가 회사령과 관세를 폐지하면서, 민족 경제 자본이 위기를 받자 조만식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2. '내 살림은 내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로 토산품 애용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자본가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3. 1910년대 일본인과 차별된 식민지 교육이 20년대 제 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되며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상재 등이 조선 민립 대학 설립운동을 벌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고 일제가 무마책으로 지금의 서울대인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했다(1924).

4. 20년대 후반 조선일보 주도로 문자 보급 운동이 시작되어 한글 교재를 보급하고, 전국 순회 강연을 개최하였다.

 

(농민·노동 운동)

1. 1923년에 전라남도 신안에서 지주가 수확량의 70~80%를 소작료로 가져가는 지주 문재철의 횡포에 저항하여 암태도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2.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고 이후 1927년 조선 노동 총동맹,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화되었다.

3.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은 일본, 프랑스 등지의 노동 단체로부터 격려 전문을 받았다.

: 함경남도 문평의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관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달되어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자 회사가 탄압하여 총 파업이 전개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신간회와 학생운동)

1. 1926년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 방향을 밝힌 정우회 선언이 발표되었다.

: 1925년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어 모일 곳이 없어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위축 되어 민족 주의 진영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2.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진영이 전개한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신간회가 창립하였다.

: 1926년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계열, 학생 단체가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삼아 준비하였지만 사회주의와 천도교 계열은 사전에 발각되어 학생 중심으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3. 신간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다.

: 광주 학생 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에 전개된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대중운동

 

(소년·여성·형평운동)

1. 방정환, 김기전 등이 중심이 된 천도교 소년회가 주도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발간했다.

2.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 여성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여 1927년 근우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근우"를 발간했다.

3.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이미 신분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신분차별에 시달리던 백정들이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결성하고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 아래 형평운동을 전개했다. (1923)

: 형평운동의 형평은 자신들이 쓰던 도구인 저울 형, 평등할 평에서 따왔다.

 

(민족문화수호운동)

1.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보급에 노력하고,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했으며, 잡지 "한글"을 발행했다.

2.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조선사 연구초"를 저술하고 낭가사상을 강조하였다.

: 낭가사상이란 조상들의 풍류정신을 뜻한다.

3.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고 국혼을 강조하였다.

: 한국통사의 통은 痛아플 통.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혈은 血 피혈.

4. 북간도의 명동학교 출신 나운규가 1926년 나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담은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처음으로 개봉되었다.

5.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간척 사업을 추진하고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열투쟁-의열단)

1.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의 주도로 조직된 의열단은 일제 요인을 암살하고,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등 폭력 투쟁을 기반으로 결성되었다. 

2. 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고,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이 의거하며 투쟁하였다

: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도쿄 궁성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3. 1920년대 후반에는 조직정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전환되어 일부 단원이 중국 황푸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4. 1932년 의열단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이후 민족 혁명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혁명이 들어가면 대부분 의열단으로 기억하자

 

 

<1920년대의 저항운동 - 국외 무장 독립 전쟁>

1. 1920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2. 1920년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하였다.

3.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로 1920년 일본군은 만주지역 간도의 한인마을을 습격하여 무차별 학생을 자행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4.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대한 독립군단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러시아 혁명군이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무장 해제 요구를 하자 이를 거부한 독립군을 공격하여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다. 이를 1921년 자유시 참변이라고 한다. 

5.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로 귀환한 독립군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참정신) 3부를 결성하였다.

6. 조선 총독부와 중국 군벌간에 체결된 미쓰야 협정으로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 1925년 미쓰야 협정은 한국인을 잡으면 중국인에게 현상금을 준다는 내용

7. 3부는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북만주의 혁신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재편되었다.

 

 

 

별별쌤 최태성 쌤의 한국사 심화 36강을 복습하기 위해 요약 정리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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